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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청예)

sole-ly 2025. 8. 13.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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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은주는 사람을 사랑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사람을 미워했다. 나 또한 그런 은주를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은주를 증오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킬 때는 주저하지 말고 숨을 쉬자. 타인을 실망시켰다는 절망이 목을 조여 오지 못하도록, 들이 쉬고 내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내가 또 네 마음의 허리를 꺾었구나, 이 세상이 오와 열에 맞추어 잘 굴러갈 수 있게끔 헌신하는 사람을 내가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 해도 이 모든 잘못에 이름표를 붙여줘야 한다면, 오영이라고 적어야만 했다.

오늘의 나는 지난 기념일에 수원과 맞춘 커플 속옷을 입었다. 은주가 선물해 준 노란 셔츠도 입었다. 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로 겉껍질을 만들었으니, 알맹이만큼은 나의 선택으로 바꾸어야만 하는 셈이다.

걸신이 타인의 재물을 탐하듯 숨을 집어삼키고, 끝내 소화 하지 못해 구토하듯 숨을 뱉었다. 괴로워도 숨쉬기만큼은 잊지 말아야지. 숨쉬기가 나의 불행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일이라 할지라도 숨쉬기만큼은 잊어선 안 됐다. 살아야만 하니까. 누군가 내 마음을 듣고 있다면, 당신도 지금 숨을 쉬세요. 삶에 질식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종로에서 유명하다는 수제 도넛집에서 오렌지 도넛 세트를 구입했다. 애인이 생리 기간에 야식으로 단것을 즐겨 먹는다는 걸 아는 남자의 성의였다. 빨간 리본이 붙은 상자를 건네받으며 나는 다시금 입꼬리를 길게 찢어 보였다.
"오빠는 유독 오렌지를 좋아하더라."
"상큼하잖아."
"그게 다야?"

여기 내가 있고, 당신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다. 당신은 그것을 싫어하지만 곁에 남아줄 수 있다고 말해줬으면 한다. 베토벤에게, 쇼펜하우어에게, 은주에게, 수원에게. 그 답을 듣고 싶다.

그렇다면 과거, 정의감에 도취하고자 도덕적 소비를 한 나의 마음이 오히려 쾌락과 가까웠던 것일까.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정신적 만족만을 위해 선택한 것들은 단발성 기쁨이었을 뿐. 미래의 연속적 행복을 스스로 박탈하는 어리석음이었나.
세계를 위한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의 지조는 공공의 것이었다. 반면 내 팔뚝을 스치며 지나가는 저 무수한 개미 떼의 행복은 지극히 사적이었다

나는 추락할 때도 단정치 못한 추리닝을 입고 싶다. 하지만 은주 너는 멋진 셋업 정장에 로퍼를 신어도 된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질 때는 꽝, 하고 아프기만 할 테지. 그때야말로 우리는 동등해진다.
나는 너를 존중할 수 있다.
단 네가 나를 존중할 때만.

도덕적으로 산다는 건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회피였다. 탈출구를 내 안에 만들어 놓지 않고 은주처럼 멋진 세계에 두었다. 앞으로 도망치는 자들은 비겁하다 욕먹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제 나는 내 안으로 탈출하기를 원한다.

은주는 아직 몰랐다. 사랑만 봐서는 사랑을 모른다는 점을. 진정으로 사랑을 논하고 싶다면 은주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조금이라도 더 봐야 마땅했다. 구정물이 존재해야만 호숫물이 맑다는 걸 알게 되듯 혐오가 이 세상에서 맡은 역할은 절대 소멸하지 않는다. 그녀의 사랑은 더러운 것들을 비난하면서 완성되니까.

여자는 완벽한 균형을 완성했다. 선함과 악함을 동시에 전시하여 어느 쪽으로도 인생을 내던지지 않았다. 배덕과 도덕의 중앙에서 줄타기하는 인간은 흔치 않은데, 스스로를 통제하고 동시에 해방을 누린다는 이율배반적인 상태를 완성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자유의 왕국이었다. 정문과 후문이 하나의 원통처럼 이어져 있어 입구와 출구가 불분명하나, 따지고 보면 입출구를 나눌 필요가 애초부터 없었다 여자의 말대로 통제와 해방이 짝이라면 입구가 곧 출구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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