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기
자은이 어릴 때에도 비슷한 말들을 외치며 헤매는 자들이 있었고, 천세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듯 했다. 과연 존재한 적 있을지 의심스러운, 무구했던 지난날로 돌아가자며 눈앞의 모든 것을 오손이라 명하고 내치려는 자들이었다. 그 말들은 단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비롯되는가? 그럴 리 없다. 그보다는 허공을 휘감은 염오의 기운을 그대로 받아내 외치는 것에 가까울 것이었다. 광증이 없는 이들도 입을 다물 줄 알 뿐, 흉중은 흡사할지 몰랐다.
"어찌되었든 날을 더해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입버릇 같은 혼잣말을 거듭했다. 누구나 더이상 새날이 주어지지 않을 때까지 날을 더해가며 산다. 그뿐이다. 야단을 떨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고 경망스러운 자들이나 달리 굴 것이다. 일어난 일들, 일으킨 일들 모조리 품고 견디면 된다. 그럴 수 있다.
말하다 보면 믿기는 날도 더러 있었다.
새벽이 되었을 때, 두 사람은 산아가 그 집에서 계속 머물 것을 알았다. 추운 계절과 더운 계절을 여러 번 겪으며 기둥과 보가 붙은 듯 단단히 물릴 때까지. 녹회빛 기와가 색을 잃다가 더 깊은 색을 찾을 때까지. 금성의 소문이 진실에 가까워졌다가 멀어질 때까지.
자은은 오지 않은 날들이 기다려졌다. 마침내 삶이 제 것 같았다.
자은은 북원소경의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켰다. 문득 태어난 집을 버리고 옮겨 사는 것을 과히 가볍게 여긴 건 아닌지 고민스러워졌다. 멀리 떠났다 돌아왔으니 나라 안에서 이주하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을 거라 잘라 판단했던 것이다. 거처가 주는 안정감, 돌아가고 싶은 마음, 이어져내려온 이야기의 일부이고자 하는 바람······. 그 마음이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겠지만 없는 자는 없으리라.
자은을 위해주었던 사람, 자은이 따르고 싶었던 사람, 처음부터 어떤지 좋았던 사람이 한편으로는 겁탈자의 무리를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자은은 받아들였다. 어그러짐을, 오염을, 곤죽이 되고 범벅이 된 온갖 것들을 평정하려 들지 않고 그대로 삼켰다. 날뛰는 것들을 삼키고도 태연함을 내보이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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