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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멀리 간다(김지은)

sole-ly 2025. 6. 29.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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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멀리 간다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가 생각나는 책. 사실 후속작인 줄 알았다.
아동 청소년 문학 평론가의 책이었음.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으면서는 내 주변을 스쳐 지나간 어린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는 어린 날의 내가 떠올랐다.
책상 아래에 쭈구려 앉아 동화책을 읽던 나의 모습, 차 타고 멀리 떠나면서도 꼭 한 권을 챙겨 보던 나의 모습..
동화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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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귀하다. 오늘로부터 가장 멀리 떠날 사람이기 때문에 매 순간 소중하다. 어린이는 우리 곁을 떠나 늘 멀리 간다. 용감하게 떠나는 것이 어린이의 일이라면 정성껏 돌보고 사랑을 주어서 잘 보내는 것은 어른의 일이다.

어려서부터 의견을 독립적으로 인정받고 그 의견을 표현해서 현실을 바꾸어 보는 경험은 소중하다. 내 의견이 존중받고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보면서 다른 사람의 의견도 동등하게 반영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타인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 없이는 시민이 될 수 없다. 상호 작용하면서 실행과 거절의 권리를 손에 들고 있다고 느껴야 시민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다.

어린이 곁에 어린이가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어린이 자신에게 심각한 일이다. 나무는 흙에 뿌리를 내리며 자라고, 사람은 친구에 파묻혀 자란다. 이렇게 어린이가 적으면 관계 경험이 단조로워지는 것은 물론 심리적으로도 흔들리게 된다. 어른들 중심의 세계에서 자신의 편이 되어 줄 든든한 또래가 드물기 때문읻.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가 사라진다는 것은 어린이의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그만큼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샹즐랭의 말을 빌리면 내 아이만 뚫어지게 보는 사람들은 눈을 떴더라도 눈을 질끈 감고 사는 것과 다름없다. 책에서는 샹즐랭이 진자 요정의 아이였는지, 아니면 사람의 아이였는데 요정이 두고 간 아이라고 억울하게 오해받았는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샹즐랭이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두껍게 슬퍼행야 한다. 두툼하게 말해야 한다. 어린이처럼 무겁게 애도해야 한다. 인색함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해 버리지 않도록 공동체의 기억으로 남겨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감각이다.

2023년 서이초등학교의 발령 2년 차 초임 교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기리는 조문 시간을 오후 네 시까지로 제한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그의 제자이기도 한 자신의 자녀에게 조화를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학부모의 글을 보았다. 슬픔을 모르게 키우고 싶은가. 그건 사람을 기르는 방식이 아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어린이는 방긋방긋 잘 웃어야 하고 해맑은 존재다. ‘해맑다’라는 말은 어른이 실현해 내지 못하는 간절한 이상향을 함축한 것이다. 어린이가 어른 앞에서 “나는 불행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공공연한 금기다. 어른들은 자신이 어른이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이 되는 걸 아주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중적인 태도다. 어린이의 웃음 속에서 구원과 행복을 구하면서 그들의 눈물과 비명은 외면한다.

아동문학을 읽는 시간은 어른에게도 자신의 과거를 재정립하는 경험을 안겨 준다. 아동문학의 비판 정신은 약자와 연대하기 때문에 동화를 읽으면 내 편을 얻은 것처럼 듬직하다.

어린 시절은 요란해야 맞다. 싸움이 끊이지 않으며 우당탕탕 시끄럽고 걸핏하면 한바탕 뒤집어지는 것이 그 시절의 특성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아동문학은 안온하지만은 않다. 좋은 아동문학은 어린이에게 싸움의 필요성을 알려 준다. 세계는 걷어차고 반격할 수 있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아이처럼’ 지난 시간으로 되돌아가 나를 돌아보는 것은 자유이지만, 어른이라면 ‘어른답게’ 어린이에게 걷어차일 대비를 해야 한다. 책임을 피하지 않는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어린이에게 책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면 어린이는 그 책을 디디며 세상이라는 엄혹한 절벽을 오른다. 그들 앞에 다양한 책을 놓아 주고 안전하게 다음 걸음ㅇ르 내디딜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어른들의 일이다. 특히 종이책은 장소와 시간의 구애를 적게 받으면서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유서 깊은 사다리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와 책의 자유로운 만남을 방해하거나, 온갖 트집을 잡아 어린이책의 가치를 공격하고 어린이가 좋은 책에 접근할 권리를 가로막는 사람을 나의 적으로 삼기로 했다. 책을 없애는 것은 미래를 맞이하는 방식이 아니다. 읽는 미래만이 있는 미래다.

영국의 작가 캐서린 룬델은 [나이를 먹었고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어린이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린이책의 초창기에 있었던 ‘교육’이라는 이름의 유령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만, 어린이책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 자체가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세상이 텅 비어 있고 진실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 동화는 희망을 보여 줍니다. 보세요. 용기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이 너그러움의 모습입니다.”

눈을 감고 쓰면서 우리는 글자보다 선명한 내면의 슬픔에 집중하고, 보이지 않는 아픔, 감추어져 있던 진실을 문장으로 드러낸다. 두려움을 뚫고서 쓰고 또 쓴다. 사람들은 그 글을 읽으며 눈을 뜨고, 현실을 명징하게 보게 될 것이다. 글과 책은 그렇게 우리의 용감한 친구가 된다. 오늘도 눈을 감고 쓰는 용기를 내어 보자. 글쓰기는 가장 용맹한 연대다.

희망은 손을 놓지 않는 사람의 것이다. 무시무시하면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이 생명이고 삶이라고 작가(아스트리드 린드그렌)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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