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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함(예소연)

sole-ly 2025. 6. 4.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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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함
데뷔 3년 만에 이효석문학상·문지문학상·황금드래곤문학상을 석권하며 한국문학의 기대주로 자리매김한 예소연의 첫 소설집 『사랑과 결함』이 출간되었다. 2021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예소연은 “옳은 이야기를 하려는 소설이 아니라 감각하는 바를 이야기하는 소설”(편혜영)이라는 예감에 값하듯 애써 무언가를 증명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을 발표하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동시대의 감수성을 증언해왔다. 한 작가의 시작을 알리듯 뜨거운
저자
예소연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24.07.26

책 표지가 참 예쁘군요.

 

수록작
우리 철봉 하자 _007 
아주 사소한 시절 _035
우리는 계절마다 _075
그 얼굴을 마주하고 _111
사랑과 결함 _147
팜 _189
그 개와 혁명 _217
분재 _251 
도블 _283 
내가 머물던 자리 _309

해설|오은교(문학평론가)
불가해한 사랑의 스캐닝 _339

작가의 말 _359

 

우리 철봉 하자가 제일 좋다. 이유는 귀여워서.

그 개와 혁명, 분재도 좋아.  

밑줄 긋기

 

[우리 철봉 하자]

 그렇게라도 그에게 책임을 지우고 싶었다. 나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그에게는 단숨에 잊힐까 두려웠다. 한때 나는 이런 생각이 찌그러진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그의 마음이 전혀 찌그러지지 않은 채로 온전한 것. 그것이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삶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내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몇몇 남자와 원나잇을 했고 늘 그랬듯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는데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까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제일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또다른 못 견딜 마음으로 돌려 막고 있었다. 나는 살기 위해 내 삶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나는 상황이 바뀔 때마다 내가 바뀐다고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돌이켜봤을 때 지금은 아주 다른 내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쪽으로. 

 

 싫어. 속으로 생각했다. 침범하고 싶어. 우리가 더 나아졌으면 좋겠어. 오지랖 부리고 싶어. 네가 싫대도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걸 하고 싶어

 

 눈물이 줄줄 흘렀다. 울음도 나왔다. 일을 저질러버린 건 분명 나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고통을 감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나는 왜인지 억울했다. 모든 게 억울해져 더 큰 소리로 울었다. 

 

[팜]

 대진은 스스로 많은 것을 이고 진 채 살고 있었다. 기후 위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농법까지 고안해가며 지속 가능한 세상을 꾸려나가는 사람이었다. 해나는 생각했다. 그중 나를 위한 노력은 얼마 정도 될까. 그저 생일이 되면 전화라도 한 통 해주고, 때때로 맥주 한잔하자고, 놀러오라고 말해주길 바랐는데. 

 

 보상은 결코 온전한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해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이은 실패 후로도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 삶은 젖은 나무판자처럼 쉽게 뒤틀렸다. 해나는 그렇게 훼손된 마음으로 쉽게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개와 혁명]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태수씨의 질문에 대충 대답하며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오래도록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잘못한 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냥 적당히 돈 없고 적당히 뭘 모른 채 살아왔을 뿐이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속없이 살아왔어도, 기쁠 때 기뻐할 줄 알고 화낼 때 화낼 줄도 알고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태수씨가 아픈 뒤로도 조금씩 기뻐했다. 물론 많이 슬펐지만, 슬픈 와중에도 틈틈이 기뻐했다. 

 

 하지만 사랑을 증명할 길은 달리 없었다. 누구의 사랑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한 트럭의 미움 속에서 미미한 사랑을 발견하고도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는데.

 

 나 같은 요즘 애들은 똑딱 핀을 만들면서 무언가를 도모할 거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뜻이라는 게 있었다.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뜻, 의지, 그런 것들. 비록 미적지근할지언정, 중요한 건 분명히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태수씨의 죽음에 관해 우스갯소리를 하고 이것저것 계획하며 삶을 영위해나갔다. 그것은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였다. 

 

[분재]

 가을이 오면 윤재를 불러 맛있는 것도 해주고 화투도 치고 그러자. 휴대폰도 고쳐달라고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런 식으로 사는 걸 버텨왔지 싶었다. 내일과 내일모레의 일을 생각하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러다보니 저절로 살아졌지.

 

 하기 싫으면 싫은 티를 내거나 아예 손을 놓는 아이들도 있었다. 보통 그런 아이들은 그냥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개 정답을 맞히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서 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것 또한 나름의 최선이라는 걸 알기에 미워 보이지 않았다. 

 

 윤재는 다 죽어가는 식물을 주워오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죽어가는 것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었을까. 윤재는 만약 할머니를 이해하게 된다면 버리는 사람들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르긴 해도 그 두 마음은 아주 미세한 차이에 불과해 보였으니까. 

 

 마음 붙일 곳 하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자꾸 화가 났다. 모든 걸 다 바쳐 사랑해도 미안해할 것이 생겼다. 그러니까, 삶은 바치는 종류의 무언가가 아닌데,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남편에게, 수진에게, 은재에게, 대모님에게 화가 났다. 

 

 어떤 삶에 관여하는 일은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말을 마친 정미씨가 땅콩을 먹었다. 윤재는 그렇죠,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수한 삶에 관여해온 할머니의 삶을 생각했다. 윤재는 그렇더라도 할머니의 삶이 마냥 사랑으로 이루어지지만은 않았을 거라고, 이제는 텅 비어버린 발코니 구석의 공간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살아갈수록 연을 맺은 생명이 늘어갔다. 어쩌면 그 무게로 인해 모든 존재가 늙어가는 게 아닐까. 참 무턱대고 많은 생명을 키웠다. 

 

[도블]

 무언가를 대비하기 위해 삶을 갈아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잔인한 일이었다. 혹시 내가 삶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하는 일들이, 사실은 정말 내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무서워졌다. 

 

 그때는 내 잘못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는 것이 나의 잘못된 습관이라는 걸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관계에 귀속된 잘잘못들, 그런 것들을 따지다보면 내가 혼자 세계를 맴도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온전히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왜 미리내를 좋아했는지 깨달았다. 미리내는 너무, 제멋대로였다. 제멋대로 내 일상을 침범해서 마치 그러라고 내가 있는 것처럼, 마구 헝클어뜨려 놓았다. 나는 어쩌면 그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정선이에게 화가 난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나는 충분히 너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인데, 너는 왜 어떠한 말도 해주지 않았니. 혹시 너는 나를 오해하고 있던 게 아니니. 나는 그런 나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화가 치밀었고 분에 못 이겨 뭐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졌다. 

 

 그리고 나 진짜 그냥 배 나온 거야. 잘 먹고 잘 살아서. 우리는 외따로 태어나서 홀로 자신을 길러낸 사람들이고 지금은 함께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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