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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백수린)

sole-ly 2025. 1. 17.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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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전에 '여름의 빌라'를 너무 잘 읽었기 때문에 빌려보았다. 백수린 작가의 섬세함과 다정한 시선이 너무 좋음!

해미는 비극적인 사고로 언니를 잃었다. 슬픔 속에 허덕이는 가족을 위해 해미는 자신의 마음을 홀로 삭힌다. 언니의 부재는 부모님 사이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고, 엄마는 신학공부를 위해 해미와 동생을 데리고 독일로 떠나 한때 파독간호사였던 '행자'이모의 집에서 머물게 된다.

해미는 독일에서 언니를 잃은 슬픔,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 부모님과의 관계 등 여러 이유로 적응에 어려움을 겪지만 행자이모의 동료였던 '마리아', '숙자' 이모와 그들의 자녀인 '레나', '한수'와 교류하며 '불쌍한 아이'여야했던 한국과 달리 '평범한 아이'일 수 있는 독일 생활에 적응해나간다.

특히 아픈 숙자이모를 위해 그녀의 첫사랑인 K.H.를 찾고 싶다는 한수의 부탁으로 셋은 더욱 돈독하고 끈끈한 관계가 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IMF로 해미는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고, 편지로 K.H.를 찾는 노력을 이어나가지만 여러 이유로 인해 해미는 친구들과의 교류를 멈추고 어른이 된다.

어른이된 해미는 어느날 대학 동기였던 '우재'를 만나고 파독 간호사에 대해 글을 쓰겠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그 시기를 회상하고 한수에게 받았던 숙자이모의 일기를 통해 해미는 K.H를 다시 찾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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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밤이 바뀌면 잠이 잘 안 오지. 이모도 독일에 처음 왔을 때 그랬어. 모든 게 낯설어 밤마다 울던 때도 있었단다."
"이모가 독일에 왔을 땐 스물한 살이었다고 엄마가 그랬는데, 어른도 울어요?"
"그럼, 어른도 울지. 겉만 커다랗지 어른도 사실은 아이랑 다를 게 없거든."

"하지만 기억하렴. 그러다 힘들면 꼭 이모한테 말해야 한다. 혼자 짊어지려고 하면 안 돼. 아무리 네가 의젓하고 씩씩한 아이라도 세상에 혼자 감당해야 하는 슬픔 같은 건 없으니까. 알았지?"

"좋아요."
나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큼이나 낯선 나라로 가는 것이 싫었지만 엄마 아빠를 위해 그렇게만 말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때로 체념이 필요했다.

그 아이들과 있을 때면 나는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나라에서 이주해온 이방인도, 언니를 사고로 잃은 아이도 아니었으니까. 그곳에서 나는 그저 온전한 나였고, 레나는 온전한 레나였으며, 우리는 온전한 우리였다. 그런 시간은 이모가 시장에서 떨이로 사온 무른 산딸기나 살구로 만들어주던 잼처럼 은은하고 달콤해서, 나는 너무 큰 행복은 옅은 슬픔과 닮았다는 걸 배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곧 세상에서 없어져버린다는 걸 미리 알고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일까.

"이모,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뭔가를 하려는 바보 같은 마음은 대체 왜 생기는 걸까요?"
나는 내 하얀 운동화 위로 녹아서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시무룩이 바라보다가 이모에게 물었다. 이모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간절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
"간절하니까?"
"응"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 색깔로 모르는 것까지 똑같이 칠해버리려 하거든."
"그건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이번엔 내가물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지극한 정성과 수고가 필요하니까."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영원히 간직한 것처럼 착각하지만 대개 그것들은 서글플 만큼 빨리 옅어진다.

이모가 손을 뻗어 내가 아이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모의 손길이 닿자, 나는 오래전 이모의 집 거실에 서 있던 어린아이가 되어 이십 년이 휠씬 넘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여전히 언니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걸 때가 있다고. 상실 이후 시간이 때때로 선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 쳇바퀴를 돌듯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사람은 희망을 보지. 그리고 희망이 있는 자리엔 뜻밖의 기적들이 일어나기도 하잖니. 그래서 나는 유리병에 담아 대서양에 띄우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네게 보낸다. 나를 위해 너의 편지를 전해준 아이들의 마음이 나를 며칠 더 살 수 있게 했듯이,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파독간호사 #이민 #우정 #퀴어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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