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궤적
여름의 빌라
고요한 사건
폭설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흑설탕 캔디
아주 잠깐 동안에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밑줄 긋기
언니는 최초의 사람, 그러니까 내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늦은 나이에, 거창한 계획이나 목표도 없이 학창시절부터 꿈꿨던 대로 미술사를 공부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프랑스에 왔다는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거나 모두가 안정을 찾아가는 시기에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다가는 결국 낙오자가 될 거라고 말하지 않은 최초의 한국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언니가 좋았다. - 시간의 궤적
어떤 기억들이 난폭한 침입자처럼 찾아와 ‘나’의 외벽을 부술 듯 두드릴 때마다, 이러다가는 내가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우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 시간의 궤적
“언니는 무섭지 않아요?” 한번은 언니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무서워.” 그렇지만 언니는 잠시 후 이렇게도 말했다. “저들은 불행한 거야. 불행한 인간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밤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 나는 그후로 더이상 그들이 두렵지 않았다. - 시간의 궤적
언니는 프랑스에 한시적으로 머물다 돌아갈 사람이고 나는 여기에 남을 사람이라는 사실이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금을 그어놓은 듯했다. 언니는 여행에 대해서 자주 말했고, 어떻게 하면 얼마 남지 않은 프랑스 체류 기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것들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고, 내게는 이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조언들이 필요했다. - 시간의 궤적
그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고 잡채나 불고기 같은 난생처음 맛보는 음식들을 모두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의 친구도 나의 부모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일주일에 세 번씩 운동화를 신고 나가 파리를 걸었고, 이따금씩 길을 잃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면 거리에 서서 조용히 울었다. - 시간의 궤적
같은 장소를 보고도 우리의 마음을 당긴 것이 이렇게 다른데, 우리가 그 이후 함께한 날들 동안 전혀 다른 감정들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요. 무無. 당신의 집 거실에 적혀 있던 글자처럼, 사실은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그저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미욱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걸까요. - 여름의 빌라
당신은 그렇게 덧붙였습니다.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이맂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 여름의 빌라
레오나는 돌멩이 끝으로 소년의 뒤쪽에 새로운 선을 다시 그었습니다. 그러고는 “집에 새 친구가 왔으니 원숭이님이 더 좋아하겠지?“ - 여름의 빌라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시간이 갈수록 할머니 안의 고독은 눈처럼 소리 없이 쌓였다. 처음엔 곧 녹을 수 있을 듯 얇은 막으로, 하지만 이내 허리까지 차오를 정도로 두텁고 단단한 층을 이루었다. - 흑설탕 캔디
오래전,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직 새파랗게 젊던 시절에 할머니는 늙는다는 게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굳는 속도에 따라 욕망이나 갈망도 퇴화하는,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 흑설탕 캔디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습게도 느닷없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다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 여름의 유성처럼 떨어져내리던 행복의 찰나들. 그리고 할머니는 일어나서 브뤼니에 씨와 함께 탑 위에 각설탕 하나를 더 쌓았다. - 흑설탕 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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