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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찬란하고 자주 우울한(경조울)

sole-ly 2025. 1. 24.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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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찬란하고 자주 우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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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증 시기의 2형 환자들은 유독 밝고 쾌활하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과하게 생기가 넘칠 뿐. 말을 하지 않으면 주변에서는 대부분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한다.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들조차도.

독일 작가 토마스 멜레는『등 뒤의 세상』이라는 작품을 통해 자신이 앓고 있던 1형 양극성 장애를 기록하며 조증 시기의 자신을 '뇌가 타버린 광대'라고 표현했다. 경조증은 조증만큼 심하지는 않으니까. 그의 표현에 따르면 나는 '뇌가 좀 더 번쩍이는 광 대'쯤 되었겠다.

경조증이 지나가면 스스로를 혹사시킨 만큼. 혹은 그보다 긴 회복기를 거쳐야 했다. 경조증 시기의 비정상적으로 높은 에너지가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그릇된 것이었는데, 이 시기의 나는 그사실도, 그리고 점차 심신이 지쳐간다는 사실도 좀처럼 깨닫지 못했다.

진단받기 전에는 이 시기가 경조증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고 그저 '체력이 좋아졌다'거나 '요즘 들어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다.

나는 경조증을 기다렸다. 봄날이 그리웠다. 그래서 우울 삽화를 벗어날 때마다 약을 자의로 중단했다. 그러나 2형 양극성 장에에서는 경조증보다 우울 증상이 더 흔하게 더 길게 나타난다. 경조증 상태는 10년 기준 1.5개월밖에 되지 않는 반면 우울 삽화는 5년으로 증상 발현 기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양극성 장애 환자는 삽화가 일어나기 전 스트레스가 될 만한 사건을 더 많이, 더 자주 경험하며, 이를 트리거라고 한다.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면서, 억울해서 눈물이 나면서도 마치 남의 일인 양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활자에 몰두하는 척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면 내가 왜 속상했는지조차 잊어버리곤 했다. 오랜 습관이었다. 하지만 감정이 사그라들었다는 건 착각이었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감정은 내 안에서 나를 갉아 먹었으니까. 감정을 인정하지 않으니 표출할 수도 없었고, 부정적인 감정의 화살은 결국 나 자신을 향했다.

  내가 사용하는 대표적인 방어기제 중에 '지식화'가 있다. 미성숙한 방어기제 중 하나로, 감정과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그것을 직접 경험하는 대신, 생각만 많이 하는 것이다. 지식화를 사용하게 되면, 내가 겪은 어떤 불쾌했던 기억을 담담하고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애쓴다. 스트레스 상황으로부터 감정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앞으로 자살 사고는 절대 없을 거라는 오만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자살을 생각하는 나 자신을 비난하고 혐오하는 일도 멈추기로 했다. 나는 그걸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하는 성숙한 자세'라고 착각했고, 짐을 떠안고 사는 사람처럼 마음 속 깊은 곳에 아무렇게나 내버려두었다.

침대에 파묻힐 듯이 잠겨 생각했다. 님을 인정해주지 않으니 이렇게까지 얼굴을 들이미는구나. 스스로 몸을 더듬어가며 꼼꼼하게 신체검진을 했다. 딱히 이상 소견이 없었다. 증상을 열거해봐도 하나의 질환으로 설명할 수 있는 뚜렷한 연관성이 없었다. 신체화 증상이었다.

우울을 피하고 싶어서 운동, 술, 수면제, 자존감 훈련, 수많은 방법을 시도해봤지만 그 어떤 것도 약물 치료만큼의 효과를 낼 수 없었다. 내가 환자라는 걸 인정하고, 약을 꾸준히 먹으면서 비로소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환자들에게 정신질환을 인정하라고, 반드시 치료받아야 한다고 굳이 권하지 않는다. 물론 꾸준한 상담과 약물 치료만큼 효과적인 치료는 없지만, 직접 겪어보니 정신질환자로서 그들이 감내해야하는 상황이 정말 '거지 같다'는 걸 너무 잘 알겠기에. 대신 이렇게 말한다 "사회적 낙인이나 편견 때문에 생길 손해보다 치료 받는 이익이 더 크면, 가세요."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말을 걸고, 특히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물어보는 연습은 그후로 무엇이든 결정을 내릴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사소하든, 중대하든.

엄마가 아기에게 항상 가슴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지는 않듯이, 단지 같이 있어주는 것도 사랑이듯이 스스로에 대한 사랑도 화려하고 드라마틱하진 않았다. 하루아침에 자존감이 거짓말처럼 오르지는 않았지만 아주 천천히, 꾸준히, 내가 느낄 수 있을 만큼 올랐다.

반 고흐를 통해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며, 우울, 불안, 수치심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예술로 승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꼭 글쓰기가 아니어도 된다. 감정과 생각에서 영감을 받아 노래를 지어도 되고, 춤으로 표현해도 되고, 그냥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악다구니를 써도 된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걸작이 예술가들의 고뇌로부터 탄생했는가.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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