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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셸리 리드)

sole-ly 2024. 11. 1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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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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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강이었으나 지금은 저수지가 된 물 밑에서 썩어가는 마을, 물속에서 조용히 잊힌 마을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불어난 물이 마을을 집어삼킬 때 이곳의 기쁨과 고통까지 모조리 앗아갔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린 시절의 풍경은 우리를 창조한다. 그 풍경이 내어주고 앗아간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되어 우리 가슴에 남고, 그렇게 우리라는 존재를 형성한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어도 우리 존재는 탐스럽게 잘 익은 복숭아를 조심스럽게 수확하듯 신중하게 형성되는 게 아니다. 끝없이 발버둥치다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거둘 뿐이다.

어디로 간들 세스처럼 분노로 가득한 사람, 피부색이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히려는 사람이 없겠는가? 윌은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 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그러나 진실을 외면할 순 없었다. 무고한 소년을 포용하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블랙 캐니언이 윌의 깊고 끔찍한 무덤이 되어버린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이 마을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진실을.

말은 자기가 아는 길로 되돌아가는 본능이 있다. 아벨이 여기서 뒤돌아 달콤한 자주개자리와 폭신한 밀짚 더미가 기다리는 그곳을 향해 느리지만 확실한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가고 나면, 나는 예측할 수 없는  광대한 황무지에 찍힌 점 하나로, 오롯이 혼자가 될 것이었다.

내가 먼저 배운 교훈을 돌멩이에 담아 힘껏 아벨에게 던졌다. 이 세상의 모든 선을 이기는 건 악이라고 아벨에게 마음속으로 외쳤다. 착한 딸이 되든 착한 말이 되든, 복종하든, 사랑하든 마음대로 하라. 그러나  권선징악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건 동화책에나 나오는 이야기니까.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는 건 토리다. 윌의 여자, 빅토리아는 얼마든지 전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인한 여성이다. 나, 빅토리아는 두 발을 딛고 일어섰다. 배낭을 등에 메고 가방끈과 어깨뼈 사이에 엄지손가락을 넣어 야무지게 끈을 조인 뒤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혼란함 속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곳의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나도 작고  하찮은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전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같지는 않았다.

나는 트럭을 세우고 밖으로 나와 나를 만들어준 이 공간을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트럭으로 돌아와 차를 몰았다. 나는 과거를 뒤로하고 새롭게 출발할 것이었다. 나는 기적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토양이 충분히 강인하기만을 바랐다. 뿌리째 뽑힌 내 나무들이 새로운 곳에서 온갖 역경을 견디고 살아남는다면, 빌어먹을 온갓 불행이 닥치더라도 나 역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파에 놓인 분홍색 누비이불을 개면서 쿠퍼 씨에게 전해 들은 전 주인의 복잡한 삶을 생각해 보았다. 평 화로운 농장을 떠나 지옥 같은 전쟁터로 떠난 하딩씨네 아들, 짐작건대 금지된 사랑에 빠져 도망간 딸. 아들은 영웅으로 딸은 천하의 불효녀로 기억될 테지만, 이 현관문을 열고 나간 그 용기는 둘다 대단한 것이리라.

초여름 빗물로 불어난 하얀 강물이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강물은 자신의 운명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듯 매우 아름다웠다. 곧 저수지가 될 거니슨강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댐이 건설되고 거니슨강 하류에 수문이 개방되어도, 지금 흐르는 강물의 일부는 변 함없이 아래로 흘러갈 거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느리더라도,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아무리 적은 양이 더라도 강물은 어떻게든 물길을 찾아내 꾸준히 흐를 것이다. 그러면, 노스포크강을 따라 새로운 삶을 꾸린 나는 그 반대편에서 흐르는 강물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언뜻 보면 자연으로 착각할 만했다. 몰랐던 호수를 발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저 호수가 인공호수이며 물속 밑바닥에는 사라진 마을이 존재한다는 걸 모른다면,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았다. 저수지 모퉁이 끼고 차를 모는 내내 나는 최대한 저수지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공터로 이어지는 익숙한 비포장도로에 접어들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젤다도, 이전의 수많은 여성들처럼 상실의 아픔을 알고 있었다. 젤다는 나 역시 자기처럼 여전히 온몸 구석구석 상실의 아픔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고 있 었다.

"그럼 브이한테 필요한 건 어떡하고요? 이건 아들 일이기도 하지만 브이의 일이기도 하잖아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여자는 참아야죠. 그게 우리의 일 이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생각보다 더 거친 반응이었다.
"여자는 아기와 슬픔을 실어 나르는 그릇이 아니에 요"


서늘한 소나무 그늘에 앉았다. 바닥에 손을 뻗어 잡 히는 대로 흙 두줌을 퍼 올렸다. 퍼 올린 흙에는 시커먼 흙, 솔잎, 조약돌, 잔가지, 나뭇잎, 자그마한 달팽이 껍데기, 솜처럼 하얀 깃털이 들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탄생, 성장, 그리고 죽음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 쓰러진 나무 사이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 모든 굴곡을 이겨내고 틈을 뚫고 빛을 향해 쭉 쭉 뻗어 나간 생명들을 둘러보았다. 숲에 깃든 태곳적 혜안은 너무 깊고 복 잡해 오롯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게 꼭 필요했던 지혜를 다시금 떠올릴 만큼은 헤아릴 수 있었다. 숲은 내게 말했다. 모든 존재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이라고.

내 과수원이 그랬듯 나 역시 새로운 토양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회복력을 가지고 있었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뿌리째 뽑히고도 어떻게든 살아왔다. 그러 나 셀 수 없을 만큼 흔들리고, 넘어지고, 무너지고,
두려움에 웅크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 나는 강인함은 이 어수선한 숲 바닥과 같다는 걸 배웠다. 강인함은 작은 승리와 무한한 실수로 만들어진 숲과 같고, 모든 걸 쓰러뜨린 폭풍이 지나가고 햇빛이 내 리쬐는 숲과 같다. 우리는 넘어지고, 밀려나고,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최선을 희망하며 예측할 수 없는 조각들을 모아가며 성장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방식 으로 성장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 모두는 함께였 다.

어떤 존재가 형성되기까지는 시간이라는 대가가 따 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해줄 것이다. 윌이 가르쳐주었듯이 흐르는 강물처럼 살려고 노력했지만,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해줄 것이다.

손바닥에는 흙 두 줌이 쥐여져 있고, 심장은 여전히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나라는 존재를 형성한 건 내고향이었다. 떠나보낸 가족 떠나보낸 사랑, 몇 없는 친구, 나를 살아가게 해준 나무들과 내게 안식처를 제공해 준 모든 나무, 여기까 지 오면서 마주한 모든 생명과 내 어깨에 내려앉은 모든 빗방울과 눈송이와, 하늘을 가른 모든 바람, 내 발이 닿은 모든 굽잇길과 내 손과 머리를 없은 모든 곳과 지금 내 앞에 있는 것과 같은 모든 개울, 모든 생물과 조화롭게 주고받으며 산비탈에서 쏟아져 나오고 중력을 얻고 소용돌이치며 다음 굽이로 밀고 나아가는 개울이라는 고향.

얇은 구름이 흩어지고 윤슬이 반짝이는 걸 보며 생각했다. 내가 삶이라고 불러온 이 여정도 잠겨버린 이 강물과 비슷하지 않은가. 저수지로 만들어놓았는 데도 온갖 걸림돌과 댐을 거슬러 앞으로 나아가고 흐르는 이 강물,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해 그저 그동안 쌓아온 모든 걸 가지고 계속 흘러가는 이 강물이 내 삶과 같았다.

내가 아들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내 아들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자갈이 깔린 물가를 따라 내딛는 우리의 발걸음을 이 땅이 단단히 붙잡아 줄 거라고, 아들도 나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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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가 살던 시대는 물론이고 모든 시대의 여성들이 자기 선택의 힘을 발견하기 전까지 한계에 부딪혀 위축되곤 했죠. 선택하고 책임지는 일이 믿기 힘들 만큼 어렵다는 사실을 빅토리아가 여실히 보여 주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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