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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한강)

sole-ly 2025. 3. 9.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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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강 작가의 책은 단연 『소년이 온다』. 고등학교 3학년 봄에 학교에서 읽었다. 새학기에 쉬는시간마다 읽었으면 주변이 얼마나 시끄럽고 활기찼을까. 그 봄에 그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너무나 시렸던 기억이 난다. 한강의 소설들이 다 그런 것 같다. 사무치도록 시린 느낌. 한 번 읽으면 헤어나올 수 없고 계속 감탄하며 읽게 되지만 한강의 책을 쉽게 손에 잡지 않는 이유는 그런 까닭이다. 읽으면 너무 우울해지기 때문에..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은 이유는 간단하다. 아는 분이 최근 읽었다고 해서~^^ 후후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한 이후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기 너무 어려웠는데 마침 있길래 빌려서 후딱 읽었다. 

 

 『바람이 분다, 가라』의 내용은 이렇다. 정희는 1년전 화가인 친구 인주를 잃었다. 인주는 죽기 전 정희에게 함께 미시령에 가자고 제의했으나 정희는 거절하고 인주 홀로 미시령에 간다. 새벽 47분경 인주는 부재중 전화를 남긴 채 미시령에서 사고로 사망한다. 인주의 사망 1년 후 정희는 '미술정신'에 실린 서인주 1주기 특집기사를 발견하고 그 글을 쓴 강석원을 만난다. 강석원은 서인주가 자살했다고 생각하며 이를 바탕으로 서인주에 대한 평전을 쓰고자 한다. 정희는 인주는 자살하지 않았고,  '미술정신'에 실린 그림은 인주가 아닌, 인주의 삼촌이 그린 그림이라고 주장한다. 석원의 목표는 인주를 신격화하여 전설로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희의 말을 묵살하고, 정희는 석원의 주장에 반박하는 자신만의 글을 쓰기로 결정하며 인주의 주변인을 찾아가며 친구의 죽음에 대해 조사한다. 

 

 정희는 인주를 슬픔을 가지고도 잘 살아갔을 사람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인주에 대해 알게될 수록 자신이 몰랐던 모습(강석원의 주장에 더 가까운)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 내내 우주물리학이 중요한 요소로 사용된다는 점이 흥미롭다(너무 어렵지만).

달의 뒷면에 대한 얘기가 가장 좋았다. 

 

우리가 아무리 가까운 사이어도, 서로를 아무리 사랑해도 각자의 모든 면모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설령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자신이 겪은 상대방의 일부를 그 사람의 전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구나. 생각했다.

 

 

책 말미에 작가의 말에는 해당 작품에 영향을 준 예술가와 저작에 대해 나와있다.

 

이동주(인주 삼촌)의 그림 - 화가 한은선

 

서인주 - 김명숙

저기 너무 무서운데요ㅠ

김영신 - 윤석남

 

 

영향을 준 도서

박창범 『인간과 우주』, 재너 레빈 『우주의 점』, 칼 세이건 『에필로그』, 이우환 『여백의 예술』

 

밑줄 긋기


  캔버스 대신 값싼 산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인주를 아는 모든 사람이 말리던 나쁜 습관이었다. 커다란 종이의 네 귀퉁이에 압정을 꽂아 벽에 붙이고, 몇 시간씩 선 채로 겹겹이 크레용으로 선을 그어 완성한 이 그림들은 삼사십 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종이와 함께 변색될 것이다.
 나에게 중요한 건 그리는 순간이니까. 그게 전부니까.
 인주는 고집 센 음성으로, 그러나 얼굴에는 상대방이 더는 화를 낼 수 없게 만드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에게 말하곤 했다. 끝까지 싸워서 인주를 이겨야 했다고, 캔버스를 쓰도록 설득해냈어야 했다고, 인주가 죽은 뒤 나는 오래 후회했었다.

수많은 죽음들이 서인주라는 사람의 삶에 점철되었고 죽음에 대한 친화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리나는 것을 누구나 추측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서인주 씨의 결혼생활은……
그것들은 추측이고 상상일 뿐이지 증거가 되지 않아요.

……그 사람은, 인주를 끝까지 오해했던 사람이에요.
그 사람의 방식으로 이해한 거였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의 방식이 틀렸어요. 인주는 자살하지 않았어요.
그걸 어떻게 알지요?
그렇다면 선생님은 그걸 어떻게 아나요? 선생님이 어떻게 그걸 결정할 수 있나요?
흥분을 가라앉히시죠.
……당신에게, 그걸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러나 지금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팔 년 만에, 백지 위에 무엇인가를 쓰려고 한다.
 무엇을, 어떻게?
 모른다.
 인주에 대해서?
 삼촌에 대해서?
 아니, 그들 모두에 대해서.
 어떻게든, 강석원의 글과는 전혀 다른 것을. 전혀 다른 사실들을.
 분명한 건 하나뿐이다. 내 말들은 그의 말처럼 매끄럽지 않을 것이다. 견고하지 않을 것이다. 일사불란하지 않을 것이다. 함부로 요약하지 마라. 함부로 지껄이지 마. 그 빌어먹을 사랑으로 떨리는 입술을 닥쳐.
 나는 더듬을지도 모른다.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내 말들로 그의 말에 부딪칠 거다. 부서질 거다. 부술 거다. 조각조각 부수고 부서질 거다. 
 
-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
 
 누군가의 죽음이 한번 뚫고 나간 삶의 구멍들은 어떤 노력으로도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차라리 그 사라진 부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아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그것으로부터 떨어져나오기 위해 달아나고, 실제로 까마득히 떨어져 평생을 살아간다 해도, 뚫고 나간 자리는 여전히 뚫려 있으리란 것을. 다시는 감쪽같이 오므라들 수 없으리란 것을 몰랐다.
 
-
 모든 것이 수축되는 한 점에서, 시간과 공간, 물질과 비물질이 하나가 된 그 점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헤어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죽은 적도 태어난 적도 없었던 것이다. 
 
 닥쳐, 라고 나는 이를 물고 중얼거린다. 산소호흡기 속에서 쒜엑쒜엑 숨을 몰아쉬던 인주의 부은 얼굴 위로, 이 모든 말들은 궤변에 불과하다.
-
-
 ......정희야. 
 
넌 아마 아주 오래 살 거야.
 
모든 걸 기억하면서.
 
지금보다 더 추위를 타면서.
 
백 살, 백이십 살씩 사는 할머니들 봐.
 
다 체형이 너 같아.
-
 
-
나는 너를 몰랐다.
네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
 
하지만, 어쩌면 너도 나를 모른다고 느낄 때가 있었을까.
내가 너를 몰랐던 것보다 더.
-

한번도 종교를 가져본 적 없지만,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기도해본 적은 있습니다. 가장 많이, 간절하게 기도한 내용은 죽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정말 존재했다면 난 이미 여러번 죽었을 겁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건, 그때마다 내가 그만큼 더 강하게 살아 있길 택했다는 걸 뜻합니다. 이건 말장난이 아닙니다.

 나는 인주가 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주는 미치지 않았다. 다만 변했을 뿐이다. 성격과 표정, 웃음소리가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을 뿐이다.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어. 얼마나 몸부림을 쳐댔어. 살려고 그렇게 몸부림을 쳤지, 죽으려고 그랬겠어요? 
 
 그녀는 작업실의 달력 가장자리에 적었다.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내 말을 들어봐.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
너를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
나에겐 그럴 권리가 없으니까.
나는 너를 몰랐으니까.
네가 나를 몰랏던 것보다 더.

-
둘 다일 수는 없다.
 
 한 사람이, 자살한 동시에 자살하지 않은 것일 수는 없다.
 
 모든 것을 버리는 동시에 버리지 않았을 수는 없다. 
 
 갓길 없는 미시령의 눈 쌓인 길에서, 벼랑의 안쪽과 바깥쪽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단 한순간, 둘 다를 택할 수는 없다.
 
 주저할 수도,
 
 얼버무릴 수도 없다.
-
 
나는 열쇠 구멍에 눈을 대고 바깥을 내다보려 한다. 희끗하고 흐릿한 덩어리뿐,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허리를 펴고 문에 귀를 댄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억울함인지 알 수 없는 흐느낌과 헐떡임으로 여자의 인사말이 토막토막 끊어진다.
 
-
 생명이 꺼지면 영혼은 고통 없는 곳으로 간다는 말을 당신은 믿습니까.
 
 그 믿음에 의지해 때로 사람들은 피 흘리는 동료, 신음하는 개를 앞당겨 죽입니다. 하지만 사실일까요. 전장에서, 동물병원에서 그들의 고통을 사라지게 할 때, 정말 사라지는 것은 그들을 지켜보던 우리의 고통 아닐까요.
-
 
 그녀에게 그곳이 어떤 장소였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이 그녀의 죽음의 장소가 된 이유를 알고 있느냐고 당신은 고쳐 물었지요. 당신의 입술이 떨리고, 열기 띤 눈이 새차게 깜박이는 사이 나는 조용히 반문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 당신의 머릿속에서 합한다 해도, 결국은 순수한 추측만으로 메워야 하는 빈 공간이 남지 않겠느냐고. 강석원이라는 사람이 쓴,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저 책과 다름없이.
 
나는 믿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찾아지지 않고, 어떤 것도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의 하나 완성된다 한들 누구도 당신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언어를, 눈물을, 피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
왜냐구요.
바로 자신 안에 그런 충동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똑같은 방법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당신은 그걸 부인하고 싶어 하지요.
이렇게 말하는 나를 견디기 어렵겠지요.
그러나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똑같은 눈을 가졌습니다.
그녀들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
-
 오래전 그녀가 음악을 들었던 방식으로 바꿔 들으면, 거기 숨겨진 진실은 이제 그가 산책 나가리라는 것입니다. 처음의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희망한다는 고백입니다. 어스름 속의 후회, 잔혹하게 몸을 으깨는 진눈깨비, 핏기 잃은 질문들, 무한히 시간이 느려지는 밤 속에서 더 찢기지 않겠다는 결의입니다.
 
 그래요. 그녀는 산책 나갔고, 다시 돌아오기를 희망하지 않았습니다.
-

 허락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조언 - 당신의 친구에게 똑같이 던지고 싶었던 조언을 당신에게 해도 될까요. 아니, 허락 따위는 구하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모든 죽은 사람의 관 뚜껑을 닫고, 거칠게 못질을 하고, 영원히 버리십시오. 그 얼굴을. 눈동자들을. 끈덕진 자책과 결의 따위를

닥쳐. 도취하지마. 앞지르지 마. 그녀들은 당신이 원한 것만큼 약하지 않았어.

-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그게 무서워서, 꿈 속에서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아.

-

억울하지 않았어. 내가 바를 넘지 못해서였어. 바를 넘었다면, 아무리 바람이 불었다 해도 장대는 나를 찌를 수 없었어.
수없이 돌이켜보았기 때문에 다른 결론은 없다는 듯, 인주의 침착한 말씨에는 완고한 데가 있었다.
기억해. 바람이 부니까 뛰지 말까, 그때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넘어가고 싶었어. 정말 넘어가고 싶었어.

이런 바람이 불면 말이야.
민서를 고쳐 업으며 인주는 말했다.
이만큼의 습기를 품은 바람이, 이만큼의 세기로 불면 말이야……
혈관 속으로 바람이 밀고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져. 모든 것이 커다란 전체로 느껴져. 언제고 내 다리를……단박에 목숨까지 꿰뚫을 수 있는 삶을 지금 살아내고 있다는 게, 무섭도록 분명하게 느껴져.

왜 가끔 이렇게 오지 않았어? 아무 말 없이라도 나타나주지 않았어? 그랬다면 좀더 견디기 쉬웠을 텐데. 환멸을. 증오를. 고통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그 여자만큼이나 부서진 정희의 얼굴을.

두 눈을 홉뜬다. 고개를 비튼다. 빗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울부짖는 사이렌이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가 부풀어 오른 팔로 물속에서 파란 돌을 건져 올린다. 누군가가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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