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게 읽다가 중간에 취업하며 제대로 읽지 못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읽어봐야 할 듯.
한나 아렌트의 '악의 무사유성'은 이제 대부분이 알고 있는 상식이 됐다. 명령에 따라 악에 복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기존에 있던 연구들은 사람들이 명령에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만 밝혀냈을 뿐 그에 대한 이유를 알아내는 연구는 없었던 것에 주목하며 르완다의 투치족 학살과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와 같은 사람들을 인터뷰 하고, 뇌과학적 실험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 뇌가 주체성을 잃고 명령에 복종하는지 즉 무엇이 그들을 복종하게 했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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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전 학자들처럼 실험실에서 명령에 따라 '폭력'이 발생하는 모습을 관찰했는데 그 결과는 놀라웠다. 지난 8년 동안 나는 다른 사람에게 실제 고통을 주는 전기 충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4만 5,000건이나 내렸다. 그중 약 1,340건의 명령만이 거부되었다.(대략 2.97퍼센트). 다시 말해 1,500명 중 약 44명만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물론 그들도 지시받은 모든 명령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민간인 역시 권위자의 지시를 따르며 다른 집단에 잔혹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예를 들어 1994년 르완다에서 투치족에 대한 집단학살이 일어났을 때 많은 민간인이 인테라함웨 민병대에 가담했는데, 후투족 민병대는 이전에 사람을 죽인 적이 없던 사람들이었음에도 종종 투치족 집단학살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주장은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국가, 대륙, 그리고 매우 다양한 문화권에서 벌어진 전쟁과 집단학살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같은 변명이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일관되게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가해자의 뇌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신경 메커니즘을 부분적으로나마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우리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의 본질적 인지 구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더 나아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우리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혐오감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발견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결국 규칙을 따르는 것은 고도로 사회화된 동물의 축복이자 '저주'이기도 하다. 덕분에 우리는 많은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잔혹행위를 저지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면 미래에 같은 행동을 반복할 가능성이 작아지기 때문에 죄책감은 강력한 감
정이다. 심지어 잘못을 바로잡고 용서를 구할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자유롭게 결정할 때보다 명령을 따를 때 죄책감과 관련한 뇌 영역의 활동이 감소하는 것을 관찰했다.
나는 처음부터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인터뷰 참여자들에게 질문했을 때 거의 모두가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했다. 심지어 번역을 도와준 연구조교들조차도 특정 인물이 피해자라고 이야기했지만, 센터 소장이 나중에 그들 역시 전 크메르루주였다고 말해주었다. 실제로는 예상보다 휠씬 더 복잡한 과정이었다. 다음 센터에서도 그러한 구분을 설명한 뒤 혼란은 이어겼다. 나는 "그 사람은 전직 크메르루주 간부였지만, 아시다시피 역할이나 책임 수준이 크지 않았으며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캄보디아에서는 명령을 따른 행동이 금지되어야 할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책임을 경감시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캄보디아특별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개인의 수는 실제로 이를 잘 보여주는 예인데, 16년 동안 단 다섯 명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들은 크메르루주 주요 지도자들만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고, 심지어 간부나 사형 집행자 같은 다른 사람은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므로 심판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국민 전체가 크메르루주에 속해 있었다. 캄보디아 사람들이 내게 말했듯이 '진짜 피해자는 정권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 모두가 유죄이거나 모두가 무죄인 상황이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진짜 피해자는 거의 남지 않았고 오직 정권 구성원만 남은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정권 아래에서 고통을 겪었고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인 피해자만 남은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들은 우리가 외집단 구성원에게 공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보다는 그들에게 공갑하려는 동기가 없다. 이것은 복종의 경우와 비슷한데, 복종하면 책임을 권위자에게 쉽게 전가할 수 있으므로 타인에게 주는 고통을 느끼지 않기가 더 쉬워진다.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본능적인 생물학적 반응에 따르기보다는 사실을 확인하는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이미 너무나 많은 집단 갈등과 그에 따른 재앙적인 결과가 발생하고 있는 인간 사회가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더욱 분열될 것이다.
모든 집단학살 정권이 가지는 공통점은 선전을 통해 '우리'와 그들 사이의 차이를 과장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민족성, 종교, 국적 또는 정치적 이념을 이용해 차이를 부각하고 사회를 분열시겼다.
지도자는 도덕적 이탈moral disengagement이라는 자기조절 메커니즘을 이용해 양심에 거리낌 없이 위법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 도덕적 이탈은 자기 행동을 재구성해 그것이 덜 해로운 것처럼 보거나. 타인에게 미치는 괴로움에 대한 인식을 줄이거나, 자신의 책임을 최소화하는 것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전쟁 중에 지도자들은 때로 도덕적 이탈을 이용해 민간인 피해를 정당화한다. 그 일이 더 큰 선을 위한 불가피한 악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적국의 주민들이 적군과 공모하거나 그들을 지원한다고 묘사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중간자 위치에 있을 때는 복종도가 더 높아서 행위 주체일 때보다 해를 끼칠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심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중간자 위치에 있는 것은 매우 편안하다. 즉 최초의 명령에 책
임을 지지 않으면서 행동을 수행할 책임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내린 결정을 사회적 맥락 속
에서 추적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인식하면, 그 결정에 대한 책임감을 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의 눈으로부터 잘못된 행위를 감출 수 있으면
이러한 반사회적 행동에 더 많이 가담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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