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사람은 살아야지.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지난 1년간 어느 때보다 오 대리를 귀찮게 했다. 목욕탕에 같이 가서 때를 밀어 달라고, 삼각지역 앞에서 파는 붕어빵을 신림동까지 사다 달라고, 오장동에 가서 회냉면을 먹자고, 오 대리가 집에서 나가려 하지 않자 자꾸만 그렇게 성가시게 굴었다. 그리고 말했다. 산 사람은 산다. 오 대리는 그 말이 싫었다.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할머니, 산 사람은 살기도 하지만 죽기도 해. 죽은 사람이 죽는 거 봤어? 산 사람이 죽기도 하는 거라고. 그때는 산 사람이 살아서 죽는 걸 돕는 일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럼, 형편없지. 근데 세상도 형편없어. 아주 엉망이야. 똥 같아. 그니까 네 맘대로 더 형편없이 굴어도 돼."
잠시나마 멈추면 다시 회복될 걸 알면서도 우리는 멈추지 못합니다. 우리가 작동을 멈추는 동안 함께 멈추게 될 사람들에 대한 책임과 돌봄의 무게가 우리를 실종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또한 그렇게 멈춘 결과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성취와 스펙의 고리에서 영영 낙오될까봐 우리는 두렵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동안 누군가는 영원히 실종되고 누군가는 죽음에 이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강제 종료 버튼을 누 를 수 있는 아주 작은 비겁함과 다정함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영원히 멈추지 않게 도와준다면 우리는 더 비겁해지고 더 다정해져야 합니다.
12주 안에 이상적인 고독사를 완성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는 안 되는 걸 안 될 줄 알면서 계속하기 위해 이 워크숍을 시작한다. 경로를 이탈해도 길은 이어진다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강제 종료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아주 작은 비겁함일 뿐이다.
송 영달은 문득 깨달았다. 재난 대비용 라디오를 판 남자는 재난이 오지 않는다고 믿게 된 것이 아니었다. 재난에 대비할 수 있다고 믿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의자에 앉으니 벚꽃 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꽃향기를 맡아 본 게 한 생애 전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버스를 잘못 타서 잘못된 곳에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잘못 온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자명하게. 버젓이. 길을 잃는 연습을 시작해야겠다고 김자옥 씨는 생각했다.
길을 잃기 위한 로드맵. 석 달의 워크숍 동안 매주 한 번씩 길을 잃는 연습을 하고 나면 얼마든지 기꺼이, 두려움 없이 길을 잃는데 조금은 익숙해질 것 같았 다. 그러고 나면 모든 익숙한 것들과도 기꺼이 헤어질 수 있을 터였다.
"중요한 건 초보자와 아마추어인 상태로 남는 거란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시작하면 끝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완성되지 않으면 그게 포기나 실패라고 생각하죠. 그건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짜 도달해야 하는 건 사실 매번 하던 걸 엎고 새로 시작함에 두려움이 없는 성실한 초보자이자 아마추어, 실패자이자 구도자인 상태를 유지하는 거다 이 말입니다. 트랙에 수많은 출발선을 굿다 보면 결국은 출발선이 결승선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 쓰이지 않은 후반부에 이 신의 존재 이유가 밝혀질 수도 있었겠지만 완성되지 않았으니 영영 모를 터였다. 생각해 보면 삶도 마찬가지다. 완성되기까지는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도대체 왜 쓰였는지 알 수 없는 무의미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그 끝에 가면 결국은 이런 맥락 에서 필요했구나, 꼭 필요한 장면이었구나 하면서 납득할 수 있게 될까? 예를 들면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도? 그러나 죽기 직전에야 밝혀지는 진실이라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대체로 나아지고 있다. 이보다 확실하고 의지가 되는 믿음을 수연은 알지 못했다. 언제나 혹은 자명하게 매일 나아진다는 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대체로 나아진다는 말은 실패해도 괜찮다는 여유와 내일은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를 다 포함하기에 좋았다.